작성자관리자
작성일2025-07-01 16:5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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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 총괄위원회가 오랜 고심 끝에 실무안을 발표했다. 작금의 상황으로 봐서는 올해 말로 예상되는 본안을 발표하기까지는 갈 길이 멀듯 싶다. 전기본이 이토록 주목을 받는 이유는 원자력과 재생에너지 간의 어쭙잖은 국가적 논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뿐 아니다. 국가가 전기본을 통해서 전력수급과 관련된 모든 계획들을 통제하다 보니 시장은 역동성을 잃어가고 있다. 이젠 이런 전기본이 계속 필요하기는 한 건가를 심각하게 짚어볼 때가 되었다.
1963년부터 시작된 국가 차원에서의 전력수급계획은 초기 300 MW수준에 불과했던 전력공급 규모가 현재 140 GW 이상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성공적으로 관리해 왔다. 처음 40여년은 산업화 시대 경제발전을 뒷받침하기 위한 전원개발이 주목적이었다. 2002년부터는 전력산업 구조개편 논의의 결과로 경쟁 시장이라는 개념이 도입되었다. 최근 들어서는 국가 에너지 정책의 최우선인 지구온난화 대응이라는 책무가 추가되었다.
2050년 탄소중립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3배 수준인 약 500 GW 규모의 신규 설비가 필요하고, 그것도 대부분 태양광 등의 재생에너지가 감당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2000년대 초기 20개 미만이었던 발전사업자 수가 2023년 현재 무려 6,300개가 넘고 있다. REC 시장 사업자 126,000여개까지 포함하면 가히 폭발적 증가이다. 전통적 전원이 주력이었던 전기본 초기 상황과 비교하면 지금은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지고 있다.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이 10%도 되지 않는데도 이러한데, 앞으로 20%, 30%로 늘어날 경우 상상이 되지 않는다. 또 다른 문제도 있다. 전기본을 통해 신규설비가 확정되면 그에 따라 전력계통을 확충해서 공급자와 소비자를 연결시킨다. 이런바, 선설비, 후계통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2010년대 이후 주민 수용성 문제로 전력계통 공사는 크게 지연되고 있다. 최근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신가평변환소는 2010년 계획 수립 당시 2019년부터 가동할 계획이었지만, 지난해 8월에야 공사가 시작되었다. 대형 원전을 비롯한 중앙집중 발전설비들은 전기본에 따라 건설해도 그 역할을 못하게 생겼다. 갑자기 늘어난 재생에너지 사업자들도 접속지연으로 아우성이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하면 될까? 일단, 순서를 바꾸자. 전력계통을 먼저 준비하고, 그 틀 안에서 설비를 생각하자. 선계통, 후설비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더라도 문제가 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분산형 재생에너지 발전사업자들은 더 이상 중앙집중형 전통적 전원 중심의 전기본 틀 안에서는 관리될 수가 없다. 그러니, 전력계통은 국가적 계획으로 튼실하게 짜 두되, 그 안에서의 설비 구성은 시장에 맡기자. 열역학적으로 엔트로피 증가의 종착지인 혼란의 상태는 역설적으로 평형을 의미한다. 불확실성을 극대화시켜 융통성으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발상이다. 다만, 깨끗하고 안정적인 전력공급이라는 국가의 당위적 목표를 향해 시장이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는 혁신적이고 정교한 가격 체계가 설계되어야 한다.
한 발 더 나아가, 전력계통 확충은 더 이상 송전탑과 송전선로 중심의 튼실한 하드웨어만으로는 안 된다. 미래의 전력 시장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송전과 배전, 공급과 소비, 교류와 직류가 함께 뒤엉켜 춤을 추게 될 것이다. 이런 복잡한 상황은 디지털, 인공지능, 심지어 블록체인에 이르기까지 각종 소프트웨어 중심의 신기술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준다. 새로운 시장이 만들어지고 새로운 기술들이 들어오니 산업도 성장하게 된다. 이런 주장을 하면 복잡한 전력망 운영으로 인한 전력 품질 저하, 투자에 대한 부담 등의 이유로 가능한 방향이 아니라는 저항을 받는다. 그러나, 혁신과 변화에 대한 도전이 없으면 기술도 산업도 없다. 선례가 없는 것도 아니다.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우리나라 IT산업은 1990년대 후반 정부 주도의 초고속 인터넷 망 구축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현재의 전력수급기본계획은 전력인프라기본계획으로 대체하자. 원자력이냐, 재생에너지냐는 국가 전력 인프라라는 틀 안에서 시장에서 필요로 하고 기술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자연스럽게 결정될 것이다. 국가의 역할은 더 이상 특정 설비를 특정 시기에 조달하는 계획을 짜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자유롭게 뛰놀 수 있는 틀을 마련하는 것이어야 한다. 국가가 제공하는 인프라 안에서 공급자와 소비자,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뒤엉켜 춤을 추도록 해야 한다. 국가는 인프라라는 틀을 만들어 주고, 그 안에서의 판은 시장과 기술에 맡기자.